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작전과정의 문제점들 == 사건 내내 한국군은 미숙한 대처와 일처리로 일을 키웠다. 거의 [[반면교사|이렇게만 안 하면 된다]] 정도의 사례가 속출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 대간첩작전 중의 군수지원 문제 병사들을 쪼개서 매복지로 보낼 것만 생각했지, 매복지에서 식사와 식수 보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투가 벌어지면 이후 탄약보급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해당 병사들을 교체해야 될 경우 어떻게 교체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취사반에서 만든 식사를 추진 보급을 하려 했으나,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차량도 들어가기 힘든 험지에 매복하여 사실상 보급이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 '''보급하러 들어가다가 아군에게 오사당할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또 식수 부족으로 인해 장병들이 엄청 고생했다. 수통 하나에 들어가는 물로는 하루종일 숲과 산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장병들의 [[갈증]]을 충분히 해갈(解渴)시켜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보다못한 예비군들은 전투지역 경계에 배치되면 매일 집에서 물을 넣은 1.5L 페트병 2개씩 들고가서 하나는 자기가 쓰고 하나는 현역들에게 줬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에 국군이 정글에서 수통을 2~3개씩 매고 다녔다는걸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문제다. 아니 당장 미군은 [[하이드레이션 백|카멜백]] 도입 이전인 이 시기에도 단독군장에 수통을 2개 차는 것이 표준이었는데 미군을 항상 보면서도 수통을 1개만 지급했으니 문제였다. * 언론에 작전계획 등의 정보가 대부분 노출됐던 문제 당시 군에서는 군이 노력한다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 언론에 필요 이상으로 작전상황을 누설하였다. 작전의 성패와 최 일선의 장병들 및 민간인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언론은 [[엠바고]]를 지켜야 한다. 언론뿐 아니라 군 자신이 애초에 그런 정보를 기자들에게 노출시키면 안되는데 그런 보안의식이 약했다. 너무 오랜만의 대규모 대침투작전을 벌인 탓인지, 이런 작전에 대한 보안의식보다는 '군이 뭔가를 하고는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했던 탓이 컸다. 예를 들면 [[특종]]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우리 군은 현재 얼마만큼의 병력이 어디어디를 수색 중이며 내일은 어디어디를 집중 수색할 계획이다''' 라는 식으로 말해서 '''작전 현황과 작전계획이 언론에 계속 유출'''되는 바람에, '''라디오 뉴스로 그 내용을 들은 공비들이 그에 맞게 도주경로를 적절하게 변경하며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사살된 공비가 남긴 기록에도 나온 내용이라 빼도박도 못한다. * 아군에 대한 수하 및 오인사격 문제 상당수의 아군 병력이 매복이나 수색 도중 다른 아군의 오인사격에 사망 또는 부상하였다. 매복작전 중 적과 조우한 상황에서 수하를 하는 바람에 답어 대신에 총격이나 수류탄 공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접적상황을 기본으로 하는 매복작전은 이미 교전 중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며, 당연히 수하를 시도하면 안된다. 기본적으로 매복 중 아무도 움직여서는 안되기에 움직이는 것은 적으로 간주하고 사격, 제압해야 된다. 이는 차단선 초소에서 수하를 시도하는 것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 아군의 전반적인 훈련 미흡 병력 이송시 헬기 레펠 경험[* 헬기 강하나 낙하산 강하를 정기적으로 훈련하는 부대는 얼마 안 되는데 그나마도 예산 문제로.]이 부족하여 낙상으로 인한 부상자를 여럿 낸 경우도 있었다.[* 군 간부 교육용 실전 수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적과 조우 시 공포심에 의해 조준사격이 아닌 머리 위 사격을 하는 바람에 아군 사상자를 내거나 적의 도주를 허용한 경우도 있었다. 실전에 투입된 특전사 부대원조차 장전이 안 된 총을 가지고 작전에 투입한 바람에 적과의 조우 순간 제때 응사를 못하여 전사자를 낸 상황도 있었다. 병력을 이송하는 헬기가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산에 병력을 내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작전 중 오류로 인해 차단선을 피해 도주 중이던 무장공비들의 경로를 막는 의외의 결과를 낳아서 연화동 일대에서 아군과의 조우 끝에 최종적으로 토벌되는 결과를 낳았다.] 초급간부와 분대장을 대상으로 발간한 실전 사례 모음집에 나오는 내용은 가관인데, 어느 부대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수류탄 안전핀만 뽑고 안전클립은 둔 채로 던진 탓에 도망가던 무장공비 추적을 포기했거나, 지급받은 수류탄을 어떻게 결속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거나 불안하다며 휴대를 거부하는 것을 물론, 어떤 부대는 아예 병사들이 '''삽탄을 할 줄 몰라''' 간부들이 대신 해줬다는 등 여러 번 읽어봐도 믿겨지지 않는 추태들이 여러 소개되어 있다. 수류탄이야 위험한 물건인지라 실전에서도 관련 훈련 부족이나 병사 개개인의 긴장도에 따라 실수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삽탄을 못한다는 것만 봐도 당시 군대의 훈련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일부 증언에 따르면 다른 자료에선 해당 사례는 소집된 예비역들이라고 한다. 예비역들이라 해도 해공군 출신이라면 신병 훈련 이후 사격은 거의 안 하는 경우가 많아 까먹기 쉬우니 불가능한 건 아니다. * 작전 중 군기에 대한 문제 아무렇게나 놓여진 피복을 보고 적이 매복방향과는 반대로 도주한 경우도 있었으며, GOP 지역의 경우, '무장공비가 여기까지 올 리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상부에서 하달된 후방 경계 명령을 대충 이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군의 지원을 받은 열상장비로 야간에 공비를 추적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작전 나간 병력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움직이거나 이탈한 경우가 많아서 근처에 있는 공비를 구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실제 작전병력도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위의 소탕과정에서 나왔듯이 자리를 이탈한 간부를 공비로 오인하여 오사로 인한 전사자를 내기도 했다.] 예비군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경계 근무를 하다 무단이탈하여 동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총기를 분실해 버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현역 지휘관이 '작전은 현역이 할 테니 사고만 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 발간 서적 중에는 현역에게 경계를 맡기고 잤다는 사례도 언급된다. 게다가 현역들도 [[전투식량]]이 맛없다고 아무데나 막 버리는 바람에 '''그걸 공비들이 주워먹고''' 이로 인해 공비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 * 작전 중 무장 탈영 수색이 진행되던 9월 22일 강원도 양구군의 한 부대에서 소속 병사가 초소로 이동 중 이탈, 내무반에 총기를 난사하고 민통선 북쪽 방향으로 탈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빡친 군 사령관이 '투항하지 않으면 무장공비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다음날 오후 군 병력과 대치하던 탈영병의 자수로 31시간 만에 사건이 종결되었다. * 지휘관의 작전 지휘 문제 차단선 형성이 늦어서 공비의 도주를 허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의 장기화에 따른 유연한 운영이 부족해서 병력 전체에 피로감을 증대시켰다. 작전 말기 기무부대장이 직접 작전현장에 나갔다가 어이없게 전사한 일도 결국 상황판단의 미스로 인해 일어난 결과였다.[* 당시 일선 수뇌부는 공비가 장기간 고립상태였기에 탄약이 거의 없거나 바닥났을 거라고 판단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그간의 교전에서 총알을 아껴왔기에 최후의 순간까지도 한바탕 교전이 가능할 정도의 탄약이 남아있었다.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전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작전을 구상하겠다면서 현장으로 갔다가 결국 저격을 당해 허무하게 전사했는데, 위험한 전장에서 고급 지휘관의 위치선정과 행동은 매우 신중해야 함을 다시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전면전도 아닌 대간첩작전에서 대령(3군단 기무부대장)이 공비에게 사살당한 건 심각한 손실이다.] * 병력들의 공격력/방어력 문제 공비를 제압하는 데 있어서 최일선 보병들의 화력문제가 불거졌다. 기존까지는 보병 분대의 화력을 소총수의 숫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후 화력강화를 위해 유탄수가 분대당 두 명씩 배치된다. 화력도 문제였지만, 병력 개개인의 방어구도 문제였다. '''목숨이 달려 있는 실제 전투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방탄복|방탄조끼]]를 지급받은 장병은 극히 드물었고 이로 인해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장병들이 많았다. * 민간인 출입 통제를 소홀히 함 결국 오인사격으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를 내고 만다. 이에 대해 단순히 사망한 주민이 [[안전불감증]]이었다고 탓하기는 어렵다. 오인사격 희생자가 살고 있던 구정리 주민들은 작전이 시작된 뒤 거의 매일 송이버섯을 캐러 다녔으나 군경의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주민이라고 신분확인만 되면 작전지역에 출입할 수 있게 허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https://m.hankookilbo.com/News/Read/199609240077168570|#]] 일단 주민들에게 식별이 가능하도록 '빨간 모자를 쓰고 여럿이 무리지어 입산하도록' 조치했으나[[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66211|#]] 이를 제때 연락받지 못하고 평소 복장대로 입산한 민간인이 일제사격에 맞아 즉사하는 변을 당한 것이다. 사건 발생 시각이 동트지 않은 새벽 6시 반 무렵이라 더욱 식별이 어려웠다.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군은 '작전지역 인근 주민들은 작전지역 내 출입을 자제하고 출입 시에는 행정기관에서 제시한 식별표시와 통금 시간을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 무개념한 민간인들 이건 군의 잘못은 아니지만, 장난이나 거짓/오인 신고도 군 작전을 어렵게 했다. 9월 20일 새벽 5시 경북 봉화에서는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접수돼 군경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지만 보상금을 노린 '''허위신고'''였다. 무장공비 침투 이후 각 경찰서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의 간첩 관련 신고가 잇따랐으나 대부분 신빙성이 없었다.[[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66210|#]] 작전을 펼치고 있는 현장에서 정신나간 짓을 하다가 체포되는 민간인들도 있었다. 9월 20일 오후 9시 30분쯤, 강릉시 강동면 대동리 주민 한 아무개(당시 37세)는 마을 야산에서 매복작전 중이던 육군 [[불사조부대]]원들에게 술에 취한 채 개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나 '나도 특수부대 출신이라 공비를 잡으러 가는데 개 한 마리로는 부족하니 소총을 빌려달라'며 2시간여동안 행패를 부리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23일 강릉경찰서에 입건됐다. 22일 오후 11시쯤에도 술에 취한 시민 1명이 강릉시청 정문앞에 나타나 경비 중이던 예비군들을 향해 욕설을 하다 순찰 중이던 경찰관에 의해 연행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